[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著, 이상원 조금선 譯, 2020)
● "시간관리 잘 하시는 분들 부럽습니다. 책으로라도 배우게 관련 서적 추천 부탁드립니다."
- 작년 10월경 너무 힘든 일정을 일단 마치고 지인들께 단톡방에서 도움을 청했다.
- 이 때 받은 답변이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 웬만한 책들은 온라인으로 사지만 마음가짐부터 다르게 하고 싶어, 12월경 오프라인 서점에서 샀다.
- 그리고 두 달을 넘게 책상 위와 가방 속을 왕복하다 며칠 전 출장길에 의지를 가지고 읽었다.
- 지난 연휴도 예산과 보고서, 계획서에 묻혀 있었고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절박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 책을 중간쯤 읽다가 깨달았다. 이건 시간관리 책이 아니라 위인전이라는 걸.
- 잘못 산 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표지의 류비셰프 사진을 바라보면 한 가지 생각이 확실히 든다. "인간인가?"
● 류비셰프
- 이 책은 류비셰프라는 인물이 타계한 후, 이 사람을 기리는 학술회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 실증론자, 유물론자,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사고를 자극한 사람이라는 긍정적 평가 속에
- 자신의 능력을 너무 분산시켰다는 비판, 철학적인 문제에는 발을 뻗지 말았어야 한다는 비판이 함께 하며,
- 류비셰프 생전에 친분이 있던 이 책의 저자(그라닌)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하는 난감함을 토로한다.
- 너무 다양한 영역으로 가지를 뻗었기에 평균을 내면 아무런 특징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있다.
- 본인은 스스로를 딜레당트 - 온갖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 - 로 규정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결이 다르지만 생물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깊이 공부하고 기록을 남긴 사람.
-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다산 정약용이 오버랩되기도 했고,
- 개인적으로는 친분이 없지만 유튜브에서 여러번 뵌 ETRI 출신 박문호 박사님이 떠오르기도 했다.
- 박문호 박사님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던 분들께서 이 분을 평한 말씀들이 떠올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 류비셰프는 82세로 죽기 전까지 70여권의 학술서적과 1만 2500장에 달하는 연구논문, 수천권의 소책자를 남겼다.
- 이 수치가 책의 광고에 있어서 이 책을 살 때 내 마음은 확실했다.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고"
● 시간통계 기법
- 류비셰프가 사용한 기법은 시간통계 기법이라고 일컬어진다.
- 26세부터 시간을 쪼개고 사용하기를 계획했고, 실제 사용한 시간도 함께 기록해서 오차를 확인했다.
- 하루 연구에만 소요되는 시간을 10시간으로 잡고 10시간을 세 부분, 또는 여섯 부분으로 크게 나누었으며
- 실제적으로는 분 단위까지 정확히 계산했다.
- 업무를 중요도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집필/연구, 두 번째는 학술 보고/강의/세미나/독서였다.
- 예를 들면 언젠가는 도서색인을 15분간, 독서를 1시간 15분, 의학신문을 15분, 소설을 1시간 30분, 편지쓰기에 15분 등.
- 이렇게 쌓인 수치는 일별, 월별, 년도별로 통계를 내기도 했고,
- 류비셰프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 저 행동을 빠지지 않고 반복했는데 심지어 자기 두 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던 날도 했다.
● 기록
- 나라면 이렇게 기록하기도 어렵거니와 하루 중 적잖은 시간을 투자해서 다시 꺼내어 통계를 내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 그런데 이 분은 한 술 더 뜨는게, 본인이 발송한 편지를 모두 타이핑해서 제본까지 해 놓았다.
- 안부인사 외에도 학술적인 토론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아이디어 저장을 겸했을거고,
- 실제 저술을 할 때 본인이 철해둔 자료를 뒤적여 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 사실 류비셰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생물학자라 사전 지식이 제로였던지라 아 그랬나보다 한 면이 있는데
- 멘델레예프의 서재에 대한 일화가 나올 때는 알고 있던 사람이라 그런지 충격이 좀 더 컸다.
- 멘델레예프의 서랍장 속에 있는 책 목록, 잡지와 기사의 제목은 손수 깔끔하게 제목과 일련번호를 달아 정리하고,
- 수천 장에 달하는 목록 카드를 작성해서 하나의 파일로 묶었으며 그 파일에는 형형색색의 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 다른 서랍에는 또 다른 목록 카드가 들어 있었는데, 인쇄물, 그림, 복사본 등의 목록이다. 일일이 만들고 관리한 것이다.
- 멘델레예프의 업적(원소 주기율표 작성)과 너무나 싱크로율이 높다.
● 다꾸 (다이어리 꾸미기) & 리뷰
- 형형색색의 펜으로 정리하는 거라면 나도 남들 못지 않을 때가 있었다.
- 대학 시절 내가 쓰던 다이어리는 간혹 여학생 것으로 오인받을 만큼 예쁘게 정리하곤 했다.
- 요새는 다꾸라는 전문용어(?)가 생겼지만 그런 말이 없던 그 시절엔 "이게 네 거라고?"라는 반응을 즐기기도 했는데
- 내게는 꾸미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지, 이걸 다시 털어서 통계를 내거나 일련번호를 매긴다거나 하는 건 상상도 못했다.
- 정보를 잘 정리한다는 것은 필요할 때 꺼내 쓰겠다는 의미다.
- 그런데 나 같은 경우, 이 정보가 내 책장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 나름 신경을 써서 파일 폴더를 정리하는 지금도 종종 의외의 장소에서 문서를 발견하고 "이게 여기 있었네?" 한다.
- 그나마도 행정서류나 보고서, 각잡고 만든 ppt 정도나 돼야 재활용을 염두에 두고 저렇게 정리한 폴더에 넣지,
- 내 업무분야에서 온라인에서 얻는 수많은 정보들은 스크랩을 해봐야 어차피 새 정보로 업데이트가 되기 때문에
- 굳이 기를 쓰고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한 작년 초까지는.
● 생성 AI로 인한 생성 정보 폭증
- 최근들어 문제가 된 게, 생성 AI 덕택에 정보를 빠르게 모아서 정리하고 가공할 수 있게 됐다는 점.
- 생성AI에만 의존을 하면 잃어버려도 또 만들면 되니 그만이지만,
- 생성AI가 모아주고 정리해 준 정보에 내가 살을 붙이는 것들이 기존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이것들을 과거처럼 대충 정리하다보니 뭔가 엄청 많이 만들었는데 남은 것이 없고, 사라진 게 아쉽다.
- 생성되는 정보가 폭증하는 만큼 정리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 아울러, 애초에 원했던 시간 관리도 지금보다는 더 잘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 중요한 건 정리 과정 자체가 아닐까.
- 세상이 좋아져서 정리 자체에는 시간이 거의 들지 않게 할 수 있다.
- 내가 사용하는 프로그램들, 접속하는 사이트를 초 단위로 기록할 수 있는 PC/스마트폰 연동 앱들도 많고
- 어차피 구글 캘린더에 회의, 출장, 보고서 취합, 제출 등 일정을 기록하는 만큼 이 정보를 사용할 수도 있다.
- 유료 모델도 사용할 수 있다는 다짐으로 앱을 몇 개 알아봤는데,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 내 경험상 시간 활용 기록과 통계처리에 노력을 들이지 않고 보고서만 보면, 백퍼센트 레슨이 없다.
- 스스로가 의외로 아날로그적인 인간이라 손으로 숫자를 쓰거나 적어도 타이핑이라도 해야 느낌이 온다.
- 저런 앱을 쓰다 보면, 깔아놓고 며칠 보다 말다가 종국에는 설치한 것 조차 잊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 논문, 기사 요약이 그렇다. AI가 요약해준 걸 보면 편한데, 짧은만큼 금방, 대충 보게 되고 나중엔 본 자체를 잊어버린다.
- AI 요약을 잘 활용하려면, 정독을 할 지 말지 결정하는 데 사용하고, 정독하기로 결정하면 본문을 제대로 봐야 한다.
- 제대로 본다고 프린트해서 밑줄치는 예전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호기심을 갖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 논문을 읽은 AI를 상대로 질의를 하면서 내용을 발췌하고, 캐낸 정보는 남에게 설명한다는 느낌으로 다시 정리해야 한다.
- 그러다보면 본의건 아니건 류비셰프나 멘델레예프의 광기어린(?) 정리와 어느 정도는 비슷해진다.
- 다만 이렇게 정리된 자료를 다시 찾아서 쓰려면 뭔가 도구가 필요하다.
- 옵시디언을 알게 된 이후, best practice를 만들려고 이것저것 깔짝거리고 있는데 아직 손에 안 익었다.
- 확실한 것은 옵시디언을 쓰건 뭘 쓰건 이것도 손에 익혀야 한다는 점이다.
● 류비셰프가 내게 남긴 것
- 백년 전에 러시아에서 살던 류비셰프라는 존재가 내게 시간통계기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이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 그러나 시간을 대하는 태도. 즉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뭔가를 마치는 것의 뿌듯함에 대한 기억은 돌려주었다.
- 정리된 정보 자체가 아닌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고민이 많아졌다.
- 결국 다시 여기에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한바퀴 빙 돌아서 제 자리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 시간을 아끼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지만, 그럼으로써 같은 시간을 더 알차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 다이어리를 쓰지 않다가 올해 1월 말부터 최소한의 기록을 하고 있다. 놓치는 일정은 확실히 줄어든 것 같다.
- 주변에 메모광 몇 분이 있는데, 언젠가 조금은 이 분들과 가까워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