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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타이포그래피 혁명가 얀 치홀트](김현미 著, 2000)

  • 한 우물 파기와 자기 혁신의 공존
    • 얀 치홀트(1902-1974)의 직업은 타이포그래퍼(typographer)
    • 글꼴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자 포스터와 책을 구성하기도 한 디자이너.
    • 부친도 레터링 아티스트였고 평생 이 길을 걸었으니 유전자 수준부터 한 길을 걸은 사람이지만
    • 캘리그라피를 시작으로 바우하우스와 유겐트슈틸, 추상미술을 만나고 나치의 방해를 받으며 계속 진화한다.
    • "어떤 새로운 것도 영원히 새로울 수는 없듯이 타이포그래피의 모습은 계속해서 변해갈 것입니다."
    • 변화의 폭이 어느 정도였냐면, 자신이 과거에 세운 이론에 경도된 사람과 지면 설전까지 벌였다.
    • "좋은 타이포그래피는 정보의 내용과 성격에 적절한 형태를 갖는 타이포그래피이지 (자신이 과거에 주장하고 기틀을 세운) 신 타이포그래피가 아닙니다."

 

  • 백 년 전의 혁신
    • 그가 타이포그래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백 년 전인 1923년.
    • 인쇄를 하려면 주조된 활자를 틀에 맞춰 끼우는 식자공(typesetter)이라는 직업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 한 페이지에 나열된 일련의 뉴스나 광고는 무질서하게 놓이기 일쑤였고 의미 없는 중앙 정렬이 흔했다.
    • 이 시기의 타이포그래피라는 직업은 "식자공들에게 수치 관계를 정확하게 명시한 밑그림을 제공해 질 높은 인쇄를 유도해내는 일"이었다.
    • 한편 인쇄 분야로 번진 산업 혁명의 여파로 리소그래피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사진이 발명되었다.
    • "리소그래피로 세밀한 표현이 용이해지자 인쇄물은 바로크, 로코코 등 장식적 치장으로 요란"해졌고
    • "기계를 통해 인쇄물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지만 인쇄물의 외관은 뒤떨어져"갔다.
    • 이와 같이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미술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를 비판했는데,
    • 수단에 매몰된 사람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편적인 기술을 써먹는데만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 빅데이터니 AI니 하는 요란한 수레에 타겠다는 요즘 사람들이 겹쳐보인다.
    • 마침 며칠 전 이런 말을 들었다. "분명 텍스트 데이터인데 최신 CNN을 적용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잘 모르면 와 딥러닝 하지만 아는 사람이 보이면 호구 하나 낚였구나 하는거죠"

 

  •  시대정신(Zeitgeist)
    • 이 시기 등장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도 이 분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장식과 구조와 기능을 연결시키려는 디자인 프로세스는 20세기 모던 디자인을 형성하는 기본적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대안적 형태를 주로 자연에서 찾으면서 시대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 아르누보에 깊이 빠진 적이 있고 지금도 매우 큰 애정을 느끼고 있는 터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정신이라는 관점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이 되었다.
    • 실용주의 철학에 바탕을 둔 현실성과 생산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얀 치홀트가 활동하던 독일어권에서 철자법 개정 이슈를 불러일으켰고 - 독일어는 모든 단어의 시작을 관습적으로 대문자로 쓴다.
    • 1925년 바우하우스는 출판물과 내부 인쇄물을 모두 소문자로만 표기하기로 했다.
    • 얀 치홀트는 이런 흐름 속에서 서체는 개인이나 특정 국가의 특색이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독일의 Fraktur처럼 국가나 문화의 특징이 짙게 배인 서체는 국경 없는 문화 창조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간결한 산세리프(sans serif) 서체만 사용하기를 주장했다.
    • 그런 면에서 아르누보는 창작자의 개성이 매우 짙게 배어 있기 때문에 이 분의 철학과는 배치된다.
    • 여담으로, 인쇄물의 크기에도 기준이 없어 책과 신문 등이 제각기로 나왔는데 841 x 1189 mm를 A0로, 이들을 나누어가는 A1, A2, A3, A4(!!)를 비롯한 DIN 476 종이 규격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 이 때다. 
    • 1차대전 이후 1917년부터 20여년간 독일에서 구성된 독일표준위원회에서 만들었는데, 이 시기 경제가 말이 아니라 마르크화를 장작이랑 벽지 대신 사용했을 정도였는데?
    • 본문에서도 언급되는 게르만다움(Germanness)이라고 봐야 될까?

 

  •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 1928
    •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고 책을 출판했다.
    • 식자공이나 인쇄 업자들에게 구체적인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씌여진 이 책의 첫 장 문구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 "기계 생산의 법칙을 알고 이를 위해 디자인하는 대신 구 세대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전통을 따르는 데 만족해 왔다. 오늘날의 제품들, 자동차, 비행기, 무선, 공장, 네온 광고 그리고 뉴욕은 과거로부터 전혀 때묻지 않은 기초적 형태를 띠고 우리 시대에 모습을 부여한다. 과거의 미학에 전혀 근거를 두지 않고 기초적 형태들로 디자인된 이러한 물체들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 바로 엔지니어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 신 타이포그래피는 기능성을 강조하며, 장식을 배제하고, 비대칭과 그 속에 있는 균형과 질서를 추구한다. 
    • 강한 대비를 추구하여 크고/작은, 밝고/어두운 배치와 함께 여백과 함께 빨강 등의 원색을 선호한다. 
    • 또한 사진이라는 신문물을 인쇄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 "그 형태의 순수성과 기계적인 생산 과정으로 볼 때 사진은 명백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시각 표현 방법이다!"
    • 본인의 실제 출간되는 서적과 포스터에 적용하며 성공을 거두었으나, 1933년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쫓겨난다.
    • 신 타이포그래피를 포함한 당시의 모던 예술 운동이 퇴폐적이고, 공산주의에 물든 문화적 과격주의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 "나치 정부는 게르만 민족의 정통성과 우수성을 기치로 블랙 레터만을 쓰기를 원했다"

 

  • 타이포그래픽 디자인(Typographische Gestaltung), 1935
    • 얀 치홀트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6주간 구류를 거쳐 1933년 스위스로 이민을 떠났다.
    • 중립국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신 타이포그래피 철학을 돌이켜보게 되었으며 생각이 넓어졌다.
    • 기존의 신 타이포그래피는 제한적인 용도에만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 전작에서 비판했던 고전 디자인 요소들을 다시금 포용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정보의 내용과 성격에 맞는 가독성 있는 해결을 찾는 것"임을 깨닫는다.
    • 이후 자신을 비롯한 여러가들이 축적한 신 타이포그래피 이론에 경도된 이들과 서면 논쟁까지 벌이며 자신이 과거에 펼치던 견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견해를 주장한다.
    • "모든 책을 신 타이포그래피로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은 이 분야를 이해 못하는 것이거나 독단일 뿐입니다."
    • 신 타이포그래피는 1920년대 당시 혼란스러운 저작물들을 정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저자의 말처럼 "가독성이 높은 간결한 디자인 표준을 정립하는 역할"로 시대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혁신
    • 1960년대에 들면 인쇄 업계는 손조판 모노타입(monotype), 라이노타입(linotype)과 같은 기계 조판 방식에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진 식자 방식이 혼재되어 있었다.
    • 이 세 방식에서 똑같이 보이는 글꼴, 보고 읽기에 편해서 모든 인쇄에 사용될 있는 서체에 대한 수요가 있었고
    • 당시 많이 사용되던 서체보다 폭이 5% 좁아서 경제성도 확보해주기를 원했다.
    • 얀 치홀트는 이런 서체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Sabon 서체를 개발했다.
    •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가독성을 꼽았는데 대문자와 소문자, 알파벳과 숫자가 함께 조화를 이루기를 원했다.
    • "완벽에 대한 감각을 기르기 위해 디자이너는 끊임없이 작업하고 엄격하게 스스로를 비판해야 합니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훈련과 더불어 지식 쌓기를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인쇄에 사용된 서체의 발달사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거의 필수적입니다. 좋은 타이포그래피를 많이 접해야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 "좋은 타이포그래피란 주로 많은 다양성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이란 분명히 다양한 경험에 그 기반을 둡니다."

 

  • 다른 영역에서 들리는 같은 목소리
    • 얀 치홀트는 평생을 서체와 함께 살아간 타이포그래퍼였다.
    • 내가 사는 세상은 이 분이 살아간 세상과 사뭇 다르지만 뼈 속에 스며드는 말이 무척이나 많다.
    • 일의 본질을 좇아야 하며, 시대 정신에 부합해야 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 한다는 말.
    • 기존 이론을 습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변형할 줄 알아야 하며
    • 내 전부를 걸었던 철학도 본질을 따라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뒤집을 줄 알아야 한다.
    • 좋은 분께 추천을 받아서 읽게 되었다.
    • 이 책을 읽는 도중 어울리는 분들이 생각났고, 안 읽어보셨다길래 선물로 보내드렸다.
    • 같은 빛이라도 다른 곳에 비추면 다른 색이 드러난다.
    • 저자가 비춘 빛은 내게 이 책을 권해준 분, 나, 그리고 내가 권해드린 분들에게서 약간은 다른 빛을 낼 것이다.
    • 이 빛들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