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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비트의 세계](데이비드 아우어바흐 著, 이한음 譯, 2021)

  • 비트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Bitwise: A life in a code
    • 일반인들에게 낯설 bitwise는 컴퓨터공학 용어로 비트 단위 라는 뜻이다.
    • 예를 들어 "사과 또는 포도"라는 인간의 말은 장을 볼 때 사과가 없으면 포도를 사가야겠다는 의사로 표현될 수 있지만 컴퓨터는 다르게 인식한다.
    • 먼저 사과와 포도를 부호화(encoding)해야 한다. 사과에 5, 포도에 6이라는 코드가 매겨져 있는 마트의 상품코드 같은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사람의 언어로 봐도 무방하지만 컴퓨터 내부에서는 2진수로 바뀌어 사과 = 5 = 0101, 포도 = 6 = 0110라는 숫자 네 개로 표현된다. 이를 4비트라고 하며 4비트로는 총 24 = 16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과 또는 포도"는 0101과 0110에 OR operation을 적용, 각 자리 중 하나만 1이어도 1로 인식하여 0111을 출력한다.
    • 이런 방식의 비트 단위 연산(bitwise opration)은 프로그래밍 과목 수강생들이나 배우는 따분한 과목이지만, MS와 구글의 프로그래머였던 저자는 bitwise라는 단어를 bit + wise로 쪼개 컴퓨터의 지혜, 즉 컴퓨터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페이스북과 구글, 유튜브로 대표되는 가상세계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그 결과로 이런 회사의 프로그래머들이 세상을 부호화한 방식으로 세상을, 서로를, 심지어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단, 저자가 말하는 bitwise는 저런 2진법 연산이 아니라 부호화를 말한다.

 

  • 꼬리표로 바라보는 관점과 범주
    • 자신이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즐겼던 게임, 부모님의 책장에서 보았던 책, 직장생활의 일화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담겨있지만 초지일관 어떤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다른 버전으로 이어진다.
    • 자신을 컴퓨터 앞으로 끌어다 앉힌 코딩의 명료함 vs 세상사의 모호함을 꿰뚫는 직관 (휴리스틱)
    • 저자의 팀이 MSN에 담은 이모티콘(emoji), Male과 Female 외에도 57가지에 달하는 페이스북의 성별 항목. 
    • MBTI, Big-5 등 심리 검사 기법과 의학서적 (DSM: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게임 (D&D: 던전 앤 드래곤즈)에 담긴 분류 기준과 이들이 미치는 영향들.
    • 사과와 포도를 인코딩했듯 데이터를 단순하게 다루기 위해서든 아니든 대상에 꼬리표가 붙으면 꼬리표의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컴퓨터는 이 꼬리표로만 대상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행동해 결과를 만들어낸다. 
    • 확산되는 SNS에서 스스로 붙이는 꼬리표 - 직장, 성별, 나이, 좋아하는 가수, 친구관계 등등등 - 로 구글과 페이스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분과 나를 마치 Digital Twin처럼 형상화하여 관심이 있을 법한 영상과 광고를 질리지 않을 만큼 들이댄다.
    • 그리고 이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다.

 

  • "사람은 문서 쪼가리가 아니다. 사람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 45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코드, 2부 인간, 3부 세상.
    • 이 중 마지막 장에는 저자가 자신의 딸을 키우는 육아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를 키워본,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장면들 - 보채는 아이 달래기, 재우느라 진빼기 등등 - 이 정겹게 기술되어 있다.
    • 하지만 한편으로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성장하는 아이를 거울삼아 우리 스스로를 보여준다.
    • 부적절한 인구 조사표에서 알게 모르게 주입되는 인종에 대한 편견, 이를 여과없이 드러낸 구글의 고릴라 사건 - 2015년, 구글 포토의 사진 분류 기능이 유색인종 여성 사진에 "고릴라"라는 꼬리표를 단 사건, 사람과 사물 중 하나를 치어야만 한다면 사물을 치도록 프로그래밍 된 우버의 자율주행차가 백인을 피해 유색인종을 칠 가능성, 오바마 정부 시절 깜둥이 집(nigga house)을 검색하면 백악관이 나오던 사건 등이 알고리즘 탓일까?
    • 저자는 잘못 붙은 꼬리표가 컨텐츠로 재생산되어 우리의 의식 체계를 지배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 "우리는 컴퓨터를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낯설게 본다"
    • 책의 뒤 표지에 적혀 있는 말이지만 이 책의 핵심과는 다소 어긋난 카피라고 생각한다.
    •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세계는 놀이든 업무든 컴퓨터나 휴대폰을 통해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 롤플레잉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 와닿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세계는 부호화 과정을 강하게 거치기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축약되고, 복잡한 관계가 생략되어 있다.
    •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람은 성장하며 스스로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비해 컴퓨터는 그럴 능력이 없다. 외부에서 잘못된 데이터가 주입되면 깜둥이 집을 찾는 이를 백악관으로 안내할 뿐이다.
    • 나 스스로는 내가 인터넷에 흩뿌려진 내 정보 이상의 존재임을 알지만 상대에 대해서는 보는 대로만 판단한다.
    • 심지어 즉각적인 반응에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상대의 의견을 숙고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일이 점점 낯설어진다.
    • 저자도 과거에 비해 최근의 인터넷 글들이 감정적이고 단편적이라고 했지만 나도 비슷한 것을 느낀다. 20년 전 나우누리 시절에도 게시판은 온갖 화제로 뜨거웠지만 논리의 전개가 있었고, 우꺄꺄꺄님을 비롯한 인기 작가들의 유머란 은 요즘의 보다 길이도 길고 기승전결이 있었다. 
    •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그땐 좋았는데 요즘은 엉망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좋겠다. 모니터에 비치는 몇 마디 말과 이모티콘이 그 사람의 일면을 대표할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 훨씬 복잡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저자의 의도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 두 번 읽어야 진가를 느끼는 책
    • 저자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책 자체가 잘 쓰여진 느낌을 받는다. 푸앵카레와 제임스 조이스 같은 그나마 낯익은 이름에서부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 책, 게임 이름들이 쏟아져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MBTI나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친숙한 예시가 많아 동시대인이라면 친숙하게 읽을 수 있다. 20년 전부터 인터넷을 썼다면 SN과 AOL의 대결도 흥미진진한 요소일 것이다. 나는 AOL에서 MSN으로 옮겨간 경험이 있어 이 부분을 정말 재밌게 읽었다.
    • 육아에 대한 경험을 머신러닝에 빗대는 부분도 마찬가지. 내 아내가 아이들을 임신한 시기와 내가 머신러닝에 발을 들인 시기가 겹쳐 있어 머신러닝 이론을 커가는 아이들 행동 변화에 빗대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정확한 년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저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시스템 프로그래머로서 아이들이 발달하는 과정을 기능 확장과 버그 수정에 대응시킨 대목에서는 웃음도 많이 나왔다.
    •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다 읽고 나서 처음을 다시 읽을 때 느껴지는 듯 하다. 앞 부분을 처음 읽을 때는 단순히 어린 시절 이야기로만 보였던 부분이, 전체를 읽고 다시 봤더니 다시 보인다.
    • 저자는 휴리스틱과 알고리즘 이야기를 하던 처음부터 인간 인식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경험에 묻힌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반복해 들으면서도 억지스럽지 않다.
    • 이 책을 한번 읽고 덮으신 분이라면 앞 부분을 가볍게 훑어보기라도 하시길 권한다. 이스터 에그를 발견하듯 숨겨진 이야기들이 다시 보일 것이다.
    • 마지막으로,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괴로우셨을 역자분께도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자칫하면 매우 어려울 수 있던 책이 이한음님의 노력 덕에 매끄럽게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