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

[우리가 사랑한 한국 PC 게임](장세용, 오영욱, 조기현 著, 2023)

"이 책은 우리들의 추억을 담은 앨범이자 한국 PC 게임의 발자취를 담은 역사서입니다."

- 한빛미디어 서평단, [나는 리뷰어다 2023]에 선정이 되고 나서 첫 책을 담은 박스가 왔다.

- 평소보다 몇 배는 묵직한 상자를 들면서 "3년째라고 기념품을 넣어주셨나"라는 김치국을 마셨는데 웬걸,

- 열어보니 손가락 두 개 폭의 두꺼운 양장본이 한 권 들어 있다.

- 제목은 "우리가 사랑한 한국 PC 게임".

- 목차를 열어보니 게임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첫 게임이 무려 폭스 레인저 (1992).

- 그리고 세 줄 아래 있는, 발매 당시 나와 친구들 입에서 "이거 진짜로 나온거야?"라는 단어를 뱉게 한 박스 레인저 (1992).

- 폭스 레인저를 개발한 제작진이 자신들의 작품을 셀프 패러디해 만든 유쾌함 가득한 게임이었다.

- 대충 중간을 잡아 넘겨보니 게임 하나당 2페이지를 차지하는 단촐한 분량. 그런데 다양한 게임들로 책이 꽉 찼다.

- 이런 책은 돈을 벌려고 만든 게 아니다 싶어 서문을 읽으니 등장하는 단어. 역사책.

- 무슨 게임에 역사까지 들먹이냐고 할 분들이 있겠지만, 이런 민간 차원의 사료 수집과 정리가 절실한 것이 대중문화다.

 

어른의 사치

- 인터넷 게시판에 도는 "어른의 사치"라는, 사진이 가득한 글이 있다.

-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조르지 않아도 된다",

- "새콤달콤 네 가지 맛을 사서 흥청망청 모든 맛을 뜯어 먹는다" ,

- "어른이 된 것을 실감할 때는 텐텐을 한통씩 사놓고 먹을 때이다" 같은,

- 사치라는 통념과는 많이 벗어나 있지만 아이의 눈으로 볼 때는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일들이 있다.

- 이 책이 그런 느낌이다.

- 폭스레인저와 박스레인저 (1992) 외에 슈퍼 세균전 (1993),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낚시광 (1994)

- 창세기전 II (1996), 임진록 (1997), 어쩐지... 저녁 (1998), 킹덤 언더 파이어 (2000), 화이트데이 (2001) 등등등

- 슈퍼 세균전처럼 즐겨 했던 게임도 있지만 당시 고사양을 요구하거나 게임을 할 여건이 못 될 때는 지켜볼 수 밖에 없다.

- 경제가 활황이던 90년대 TV와 지하철을 비롯한 각종 매체를 뒤덮은 게임 광고를 보면서 와... 재밌겠다.. 만 했던 내게,

- 직접 게임을 할 때의 몰입감과 재미를 주지는 못하지만 아련한 아쉬움과 채워지지 않았던 욕망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 그러므로 당연히, 책을 읽는 순서는 내가 했던 게임이 먼저

- 그 다음이 해보고 싶었지만 못 해본 게임.

- 개인적으로 전공 수업 비중이 늘어난 한편 IMF를 벗어나 PC방 산업이 확산된 99년 경부터는 모르는 게임이 대다수.

- 이런 게임들은 (미안하지만) 여전히 관심을 끌지 못한다.. 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빠져들어 읽고 있는 나를 본다.

 

왼쪽에는 스크린샷, 오른쪽에는 설명글

- 이 책은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게임 하나당 책을 폈을 때 보이는 두 페이지에 내용을 담았다.

- 왼쪽에는 박스 디자인과 함께 6장의 스크린샷, 그리고 발매 시기, 가격 등의 정보를 담고

- 오른쪽에는 당시 게임 개발과 발매, 시장 반응과 게임 업계에 미친 영향 등이 절제된 분량으로 정리되어 있다.

- 왼쪽 페이지는 추억을 떠올리기에 좋고: <서풍의 광시곡> 패키지 사진을 보면 귀에 OST가 들린다. (YouTube 링크)

- 오른쪽 페이지 글을 읽으면 게임에 관계된 상황들을 알게 된다: <불기둥 크레센츠>멤버가 이런 분들이었을 줄은!

- 그리고 <폭스 레인저>와 함께 최초 PC게임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던 <그날이 오면>의 후속작이 2014년 모바일 게임 <그날이 오면: 드래곤 포스 2 for Kakao>로 출시되었을 줄은!

- 책은 상당히 두껍지만 추억을 소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 보석같은 인터뷰

- 인터뷰 기사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작품으로 드러나지 않는 창작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고 싶다면 창작자의 영혼을 불러와야 하고, 인터뷰만큼 좋은 매체는 없다.

- 한편으로 인터뷰는 증언이기도 하다.

- 뭔가를 결정하게 된 과정, 당시에 영향을 받았던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통해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이 책에도 적지 않은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책에 혈통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 사진과 함께 실린 게임을 만든 이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time span이 길다.

- 인터넷도 없던 시절 PC통신 동호회에서 만나 정보를 교류하며 실력을 쌓아 실전에서 만난 이들은

- 생각보다 일찍 시작해서 생각보다 오래, 지금도 계속해서 작업하고 있다. 

- <서풍의 광시곡> 음악을 만든 황주은 님은 <파이널 판타지 III>로 게임을 시작해 하이텔 애드립 동호회와 게임기 동호회에서 활동을 했고, 거기서 만난 이에게 <창세기전> 제작 합류를 제안받았다. 이후 넥슨에서 <바람의 나라>(1996) 등 음악을 제작했고 <아이온>(2008), <V4>(2019)까지 이어지고 있다.

- <폭스 레인저> 시리즈에 참여한 김성식 님은 PC판 <왕의 계곡>(1989)과 <마성전설>(1990)을 만든 분이고, 지금은 나우앱이라는 회사를 창업해 AI로 제품 불량을 검출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 뜻밖으로 생각될만큼 맥락이 이어지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 <에반게리온>(1995~현재)을 제작한 GAINAX는 <프린세스 메이커>(1991)의 제작사이기도 하다.

 

● 시대 상황을 정리해주는 컬럼

- 2023년 현재의 시점으로 길게는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 지금이야 게임을 돈 주고 사는 것 뿐 아니라 게임 내 과금까지 받아들여지지만

- 과거에는 게임은 "당연히" 알음알음 + 동네 컴퓨터 가게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복사를 하는 것이었고,

- 온라인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당시 패치는 디스켓을 발송하거나 PC통신에서 다운로드를 받아야만 했다.

- <어스토니시아 스토리>(1994)는 게임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해 정품 인증 패스워드를 묻는 패스맨이 나온다.

- 이런 시대상을 설명해주며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간극을 해소하는 역할을 컬럼이 맡고 있다.

- 한편, 년대별로 인기를 끈 게임들을 나열하며 장르의 변화를 일본의 환경과 비교해 설명하는 등 게임 하나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본편을 엮어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 커뮤니티와 네트워크의 힘

- 저자들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커뮤니티와 네트워크의 힘이다.

- 과거 여러 소프트웨어 관련 동호회들이 컴퓨터 관련 잡지를 통해 회원을 모집하던 시절부터 

- PC통신을 거쳐 현재의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형태는 달라도 곳곳에는 게임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었고

-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만나는 교차점에서 작은 씨앗들이 잉태되어 자랐다.

- 이들은 중학생, 고등학생 때 게임에 빠져들었지만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 인기 게임을 카피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메워줄 동료를 찾으며 자발적으로 생태계를 만들어갔다.

- 지금에야 포토샵이니 언리얼엔진이니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없었다.

- 게임 그래픽을 만들기 위해 게임 그래픽을 만들 도구부터 먼저 만들어야 했던 시기, 믿을 만한 동료는 절실했을 것읻.

 

-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는 말이 있다.

- 잠을 줄여서 공부를 하라는 뜻인데, 잠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놀이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보통이다.

- 거의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것을 우려한다.

- 게임 중독이라는, 치료가 필요한 단계에 빠지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게임을 통해 미래를 만드는 이들도 있다.

- 게임 산업의 흥망성쇠는 만화 사업과 닮은 점이 많다.

- 부모가 자녀로부터 떼어놓으려는, 학업의 방해물임과 동시에 정서를 해치는 주범으로 인식된다는 점이 그렇고

- 적잖은 진통을 겪으며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왔지만 그 후 화려하게 꽃피웠다는 점이 그렇다.

- 현재 대부분의 게임 시장이 모바일과 콘솔로 옮겨갔고, 수록된 게임은 2004년작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 그렇다면, PC게임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어찌 보면 정중한 장례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 제목에 있는 우리가 사랑한이라는 단어가 조금 아프게 닿는다.

- 책을 읽다가 사놓고 플레이하지 않은 <창세기전 III Part 2>가 본가 한쪽 어딘가 꽂혀 있다는 게 떠올랐다.

- 어느새 게임을 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지만, 게임을 통해 아이들이 상상력을 넓히고 친구들과 우정을 쌓기를 바란다.

 

※ 한빛미디어 2023 도서 서평단 "나는 리뷰어다"의 일원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