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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80)

● "선행을 한 후에는 선행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려라"

  • 국민학생 시절, 만화 세계사라는 책이 있었다.
  • 세계의 역사를 굵은 흐름 위주로 만화로 엮은, 권 수가 제법 많은 책이었는데 각 권의 표지 안쪽에는 해당 권을 대표하는 인물의 격언이 쓰여 있고는 했다.
  • 몇 권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행을 한 후에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선행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라는 말과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이라고 쓰여 있던 것이 기억난다.
  • 선행의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라는 말이 왠지 깊게 남아 당시 학급신문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저 말을 싣기도 했다.
  • 이후 역사를 배우며 로마제국의 5 현제 중 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고, 영화 속에서는 '글래디에이터' 초반에 나쁜 아들에게 암살당하는 현명한 노 황제가 이 사람이라는 설정이었다.
  • 그리고 딱 여기까지. 더 이상의 업데이트는 없었다.

● 2020년

  • 지난 1년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다.
  • 인류의 역사에 크게 남을 것이 분명한 코로나 19로 인한 삶의 변화도 컸지만 이와 별도로 나의 삶과 일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 회사에서의 기간을 제외하고도 10년 넘게 몸담은 학계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고 데이터를 입구 삼아 들여다본 IT 분야의 역동성과 생동감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했다.
  • 하지만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AI 분야의 속도를 목격하면서 데이터 오류만 몇 주째 잡아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 데이터 추출을 위한 노가다성 코딩으로 인한 짜증이 가끔은 한계를 넘어 분노로 표출되기도 했다.
  •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제약은 많고 내 능력은 욕심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에 많은 날들을 지배당했다.

● "나 자신에게 (Τὰ εἰς ἑαυτόν)"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로 20년(161-180)을 집권했다.
  • 영토는 북쪽으로는 잉글랜드 지방, 서쪽으로는 스페인과 지브롤터,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해안과 이집트 전역, 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과 지금의 터키에 이르렀다.
  • 즉위 직후에는 파르티아가 동부 지역을 침공했고, 그다음에는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전염병이 창궐, 재위 후반 10년은 도나우 지역에서 게르만족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심지어 175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총독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했다. 말이 좋아 황제지 동시대인 중 이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더 심하게 받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 그리고 50줄에 접어든 이 사람은 도나우 강가의 전장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고자 스스로를 일깨우고 가끔은 꾸짖으며 때로는 대화하는 이 글은 제목이 따로 없다가 "나 자신에게"를 거쳐 17세기가 되어 "명상록"이라는 제목이 붙어 오늘에 전해진다.

●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말 

  • 원제를 모르고 보면 그저 한 권의 철학책, 또는 자기 계발서로 읽힐 수 있다.
  • 그러나 이 글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 스스로 다짐하며 적은 글임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유혹이 많았는지, 황제로서 얼마나 답답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 "선한 일을 하고 욕을 먹는 것이 제왕의 일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라거나, "그 어떤 예기치 않은 온갖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살아가는 일은 춤추는 것보다 씨름하는 것과 더 비슷하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황제로서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바람 속에 서 있음을 알게 되고
  • "누군가가 나를 경멸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경멸받은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 이런저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다면 (...)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고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글에서는 타인을 대하는 관대함보다 남들이 뭐라건 자기중심을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 고작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인내심의 한계를 넘나들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 "변화를 수용하고 이성으로 방향을 찾으며 죽음을 받아들여라" 

  • 본인의 상념을 적은 것이라 그런지 반복되는 문구가 많이 보인다.
  • 그중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강조, 외풍과 동물적인 충동에 의한 탈선을 이성으로 바로잡으라는 경구, 그리고 위대한 인물들도 한낱 흙이 되고 잊혔으니 너(나)도 집착하지 말라는 다짐이 자주 보인다.
  • 스토아학파를 근간으로 한 성찰의 결과물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를 거부하려는 본능, 자리를 이탈하려는 이성, 떠받드는 사람들에 의해 붕뜨기 쉬웠을 스스로의 정서를 다잡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 "먹어봤자 아는 맛이다"는 옥주현의 명언은 음식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며 스스로에게 읊는 말이지, 식욕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 고대인의 세계관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 엠페도클레스라는 사람이 불, 흙, 물, 공기를 바탕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한 4원소설을 주창했다는 것을 암기식으로 배우긴 했지만 고대인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 마르쿠스 황제의 글에 4원소설을 비롯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이 인용되는 모습을 보면서 고대인들의 생각을 엿보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 한편으로는 역자가 2천 년 전 글에 달아둔 주석을 보면서 그리스 철학과 희곡의 보존상태에 놀라기도 했다. 일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글에서 기병대가 어떻게 배치되어 어떻게 적을 습격하고, 적은 어떤 작전으로 알렉산드로스 군을 괴롭혔는지 기술된 내용을 보면서 대체 이 시대 사람들의 기록정신은 어떻게 된 걸까 싶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 이렇게 읽을 책은 아닌 것 같다. 

  • 새해를 맞이하며 한 권을 빨리 읽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고 싶었다.
  • 아이들과 그림놀이를 하다가도 읽고, 새벽에 일어나 사이클을 타면서 읽기도 했으나 이렇게 후딱 읽고 치울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제법 불편하다.
  • 책 표지에 "1년에 두 번은 꼭 읽는다"는 빌 클린턴 前 미국 대통령의 말이 적혀 있지만, 책상 한편에 놓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나 집중이 안될 때, 괜히 누군가가 원망스러울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읽으면 가장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