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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유닉스의 탄생](브라이언 커니핸 著, 하성창 譯)

  • 이 책은 컴퓨터 책이 아니라 역사책이다.
    • 책의 배경은 1970~80년대 AT&T Bell 연구소.
    • 당시의 벨 연구소는 튜링상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던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였다.
    • 전화회사가 만든 이 연구소에서 유닉스라고 하는 컴퓨터 운영체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 어떻게 대중화되고, 사업화되고, 모회사의 운명과 함께 어떻게 스러져 갔는지,
    • 그리고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한 역사서라고 볼 수 있다.

 

  • 생각보다 익숙한 이름의 사람들, 그리고 알고보니 유닉스에서 유래한 기능들.
    • UNIX에 대한 책인 만큼 UNIX를 중심으로 서술되며, 구글의 전 CEO 에릭 슈미트를 비롯해 놀랄만한 이름들이 자주 언급된다.
    • 그리고 C언어와 TCP/IP 프로토콜, UTF-8 인코딩을 비롯 "이것도 유닉스에서 나왔어?" 싶을 정도로 그동안 유닉스를 몰라뵌 것이 미안할만큼,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유닉스의 유산을 일깨워준다.
    • 1942년생으로 1967년 벨 연구소에 입사한 브라이언 커니핸은 올해 79세. 
    • 여러 동료들과 함께 유닉스를 개발한 산 증인으로서 역사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책을 썼나 싶었다.
    • 그러나 책 전반에 묻어나오는 본인의 선배를 비롯한 동료들에 대한 존경심은 책의 집필 목적이 이들에 대한 헌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저자는 "The C Programming Language"의 저자인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1997년 대학 1학년 시절 전공필수로 마지못해 들었던 C언어 수업의 교재가 저 책이었던 것 같다.

 

  • 유닉스를 몰라도 읽기에 별로 지장이 없다
    •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 중에서 유닉스, 또는 리눅스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좋을 곳은 4장과 5장 뿐.
    • 나머지는 사람과 조직, 일에 대한 이야기라 유닉스를 몰라도 별 지장이 없다.
    •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을 때 로마 군대, 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도 되는 것과 비슷하다.
    • 4장과 5장은 리눅스를 사용하는 사람이 읽으면 흥미진진할 이야기가 가득하다.
    •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파일 시스템, 셸 스크립트 (bash라는 이름이 Bourn이라는 사람이 다시(Again) 만든 SHell 이라는 뜻이라고), 여러 명령어를 | 로 이어 연속으로 실행하는 파이프, 파일 내용을 출력하는 grep, 모든 책에 쉬운 언어라고 나와있지만 어려워서 미칠 것 같던 C언어, 소스코드를 컴파일할때 따라서 타이핑하던 Make, 파일 내용을 변경할 때 쓰는 sed 등 손가락이 외우는 명령어들의 탄생 비화가 펼쳐진다.

 

  •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천재들이 모인 조직
    • 2차대전 당시 설립된 비밀 항공기 연구소인 스컹크 웍스(Skunk Works. 록히드 마틴의 신형 전투기 개발 TF)와도 비슷한 느낌인데, 이런 류의 책을 보면 삼국지나 수호지같은 군웅소설과 플롯이 비슷하다.
    •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어디선가 나타난 여러 영웅들이 각자의 장기를 살려 문제를 해결하는 형식.
    • 딱히 외향적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끼리 만난지 얼마 안되어 죽마고우도 못따라갈 합을 펼치며 결과를 낸다.

 

  • 조직의 관리자 :  기술적 리더
    • 스컹크 웍스에는 켈리 존슨이 있었다. "저 스웨덴 놈 눈에는 공기가 보이나?"라는 말을 들을 만큼 도면만 보고도 항공기가 받는 양력과 공기저항으로 인한 날개의 온도 상승을 거의 정확히 예측했던 사람.
    • 그리고 벨 연구소에는 더글러스 매클로이가 있었다. "뛰어난 지적 능력과 비할 데 없는 기술적 판단력, (중략) 을 가진 리더였다. (중략) 유닉스 자체와 C, C++같은 언어, 많은 유닉스 도구가 모두 더글러스의 훌륭한 안목과 날카로운 비평 덕분에 개선됐다. (중략) 벨 연구소 관리자들은 기술적으로 유능했다."
    • 그 외에도 "벨 연구소 연구 부문에서는 일반 관리자부터 연구소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술적인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 내부와 다른 조직에서 진행되는 일을 빈틈없이 이해했다. 부서장은 부서원들이 하는 일을 실제로 상세하게 알아야 했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주장할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설명하고 서로 연결을 맺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 이 대목이 가장 부러웠다. 실무 능력이 있는 사람을 승진시켜도 문제 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그 만큼, 또는 이상의 실무진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 상당히 많은 기업이 AI 조직을 만들면서 거듭하는 실수가 AI는 모르지만 경력이 많은 사람을 부서장으로 앉히는 것, 또는 얼마 없는 AI 경험자를 부서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 전자는 문제 정의도 못하고 도움도 못 줘서 망하고, 후자는 유능한 실무자를 한 명 버리고 무능한 관리자를 한 명 만드는 식이라, AI는 하지 않고 이 사람을 괴롭히며 서서히 망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 이런 상황에서는 단기적으로는 AI에 대해 공부할 의지가 있고 전반적으로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를 아는, 소통능력과 학습능력이 좋은 관리자를 다른 부서에서라도 데려와 세우고, 장기적으로는 AI 경험자를 관리자로 만들어도 문제가 없도록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

 

  • 조직문화 
    • 우리나라에서 조직력을 강화한다고 하면 정기적인 회식과 체육대회를 빼놓을 수 없다.
    • 유닉스가 개발되던 시기 AT&T에서도 그랬던 것 같지만 유닉스 연구자들은 여기에 정 반대로 행동했다.
    • "우리는 요즘 자주 보이는 팀워크 조성 활동 같은 것에는 전혀 열의가 없었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종류의 활동은 억지스럽고 무의미하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구성원이 서로 좋아하고 존중하며 서로 함께 있는 것을 즐기는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노력이 든다. 이런 조직은 경영진의 지시나 외부 컨설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조직은 함께 일하고, 때때로 함께 놀고, 다른 사람이 잘 하는 일을 인정하기를 즐기다 보면 유기적으로 자라난다."
    • 일이 좋아 모인 사람들은 같이 일을 시켜야 행복하다. 술잔과 노래방 마이크가 아니라 서로의 성과물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신뢰가 생기고 친분이 싹이 트는게 순서다.
    • "멤버들은 서로 장난을 쳤고, 큰 회사에서 불가피한 관료주의에 저항하면서,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즐거워했다. 앞서 배지 착용 지시를 무시한 이야기(사진을 붙이도록 되어 있는 회사 출입증에 미키마우스 사진 넣기, 가슴에 걸고 다니도록 되어 있는 신분증을 셔츠 안 가슴털에 붙여놓고 요청 받을때만 보여주기 등)를 이미 언급했다. 이외에도 윗선에서 권고한 다양한 관례와 절차 덕분에 저항할 기회가 더 있었다."
    • "사람들은 유닉스 방에 공익을 위해 음식을 놓고 가곤 했다. 어떤 사람은 고품질 초컬릿 블록 10kg을 발견해서 사람들이 조금씩 맛볼 수 있도록 놓고 갔다. 하지만 음식이 항상 그 정도 수준이었던 것은 아니다."

 

  • 협력하는 환경
    • 천재적인 개인들의 존재는 이들이 각자 일할 때보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때 배가된다.
    • "연구소의 문화는 매우 협조적이고 서로 돕는 분위기였다. 누군가의 사무실에 걸어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거은 지극히 통상적인 절차였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요청 받은 사람은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줬다."
    • "(UNIX 개발팀과) 가장 가까이 있는 관련 전문가 집단은 수학 연구 센터였다. (...) 비범한 수학자들이 많았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통계학자로 알려졌던 존 투카('비트'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도 복도 바로 건너편에 있었고, 수학과 통신의 거의 모든 연구 영역에 걸쳐 범접하기 어려운 전문가들이 있었다."
    • "그들은 항상 도움을 줄 준비가 돼 있었고, 이는 기술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로널드 그레이엄은 뛰어난 수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저글링 전문가였고 국제 저글링 협회의 전 회장이었다. (...) 1시간동안 그의 사무실에서 일대일로 지도를 받은 다음에 어느 정도 감을 잡았던 것 같다."
    • 유럽에서 학위하던 시절 독일 Chemnitz University에 2주간 파견을 가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그룹은 매일 아침 8시에 커피타임이 있었는데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는 시간이었다. 실험그룹이었기 때문에 뭐가 잘 안된다는 궁시렁도 주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어느 날, 당시 교수님께서 대화 중에 갑자기 진지하게 "coffee machine should not be underestimated"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듣자마자 무슨 말씀이신지 와 닿았다.
    • "유닉스 방은 그냥 재미있는 곳이었고, 항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 거의 유닉스 방에서만 일하고 사무실은 좀처럼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러 하루에 몇 번씩 들르는 사람도 있었다. 동료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서로 알게 되고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유닉스 방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커뮤니티 환경
    • "벨 연구소 과학자들은 학술 연구 커뮤니티에도 참여해야 했다. 이는 연구할 문제와 통찰력의 또 다른 원천이 됐고, 제록스 팰로앨토 연구소나 IBM 왓슨 연구소 같은 다른 산업계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연구와 보조를 맞추는 데 도움이 됐다. (중략) 연구원이 다른 연구소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양방향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례로 나는 1996년 가을을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냈는데, 벨 연구소에서 전체 비용을 지원해줬다. 심지어 내 연봉까지 지급해줬으므로 하버드 대학은 무료 서비스를 받은 셈이다. 1999~2000학년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외부에 벨 연구소를 드러내는 것은 채용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연구 분야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중요했다. 비밀스러운 회사는 재능 있는 인재를 끌어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점은 현재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 그리고 벨 연구소는 기술 개발 뿐 아니라 교재를 상당수 출간하며 또 다른 명성을 쌓았다.
    •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배포하는데 문서화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원들 스스로가 글쓰기를 진지하게 대했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첨삭하는 문화가 있었다.
    • 학계에서 평판을 높이기 위해 경영진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6개월간 전적으로 책을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작권은 벨 연구소가 보유하고 인세는 저자가 받았다. 
    • 벨 연구소는 출판물로 쌓은 명성을 통해 더 좋은 인재를 채용할 수 있었다.

 

  • 역사 속에 이런 집단은 종종 등장한다.
    • 100년 전 파리에는 개성있는 화가집단이,
    • 같은 시기 오스트리아 빈에는 슈뢰딩거와 볼츠만을 비롯한 물리학자들이,
    • 메이지 유신 시기의 일본에는 여러 선각자들이 있었고
    • 우리 나라에도 세종과 정조대 유능한 학자들이 많았으며
    • 지금은 근 60년간 가장 인구가 적은 특정 연령대의 아이돌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 50년 전의 벨 연구소가 부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나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다.
    • 어느 순간 이런 그룹에 끼었을 때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 한빛미디어 2021 도서 서평단 "나는 리뷰어다"의 일원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